백영희목사 설교

Posted at 2009/12/28 02:00 // in Misc // by Daniel

이분 설교는 느리고 깁니다.

이 목사님의 설교 일부를 현장 녹음한 타자본을 가지고 만든 책이 있더군요

사투리등도 다 그대로 써있습니다.

(목사님 약력)

본문: 열왕기하 2장 5절~11절

작년 졸업식에도 제가 설교를 맡아서 이 설교를 증거했습니다. 이렇게 형식으로 된 일을 문서로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재차 주신 것은 역사적인 한 과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시고 교훈하신 우리가 받을 생명의 도인 것입니다. 모든 성경 학자들이 엘리야는 예수님을 상징했고 엘리사는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한 것으로 그렇게 다 공통적인 해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와 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지나간 그 일로써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상징으로 주신 것이요 하나의 예표로 주신 것이니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른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이라는 것을 여게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는 여게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이 무엇이며, 우리가 여게서 보고 배워 갖추어 가질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간추려서 몇가지 만을 간단하게 생각해 보려 합니다.

첫째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를 때에 중간 중간에 수많은 선지 학교가 있었고 또 선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갈려고 하는 엘리사에게 대해서 많은 만류를 했습니다. 당신의 주를 하늘로 올리워 가실 터인데 그분을 따라서 한정없이 가다가는 대단히 위험하니 그만 가지 말라고 하는 그런 만류를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에 엘리사는 벧엘에서도 그 신앙 동지들이 너무 어렵고 외로운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주 엘리야는 벌써 하나님께서 하늘로 올리워 가실 터인데 따라가면 그 일에 낭파가 되지 않을 것이며 위험하지 않느냐?’하고 만류했지만 ‘나도 안다. 잠잠하라. 내가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두고 맹세하고 엘리야의 확고한 그 인격을 두고 내가 맹세한다. 나는 끝까지 내 주 엘리야를 따르는 이 일에 중단하지 않겠다.’ 하면서, 그 모든 신앙 동지의 동창들을 다 버리고 홀로 엘리야를 따라 갔습니다. 이것을 이 계시를 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첫째로 요구하시는 요구입니다.

우리가 신앙 걸음을 걸어갈 때에 신앙 동지의 그 유혹,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그 신앙에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라는 안일의 한계를 정해 놓고 한정없이 끝까지 위험천만한 그런 지나친 치우친 정상이 아닌 그런 신앙 걸음을 걷지 말라고 하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그 일에 제한하고 제재하는 자기들의 형편과 사정을 인해서 엘리야를 따르는 그 걸음을 멈추는, 그 일을 하지 않기로 단정을 짓고, 자기야 어쨌든지 끝까지 엘리야를 따를 것을 각오하고 따랐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요구하셔서 이 계시를 첫째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졸업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해서도 이 말씀을 증거하게 하신 주님은 새롭게 다시 이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 걸음에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이 한 가지만을 엘리사는 가졌고, 남은 모든 학생들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들의 형편과 사정을 생각했고 주님을 따르는 거 외에 자기네들에게 이런 저런 지혜나 타산이나 그런 마음들을 가졌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이 일 외에 자기들을 자기들의 형편을 생각하는 것이 있었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이 외에 자기들에게는 이런 저런 계산이나 타산이나 가지는 자기네들에게 엘리야를 따르는 그 생각외에 딴 생각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를 따르는 그 외에 딴 생각이 있었고 엘리야를 따르는 자기 외에 자기를 생각하는 이거 하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자기, 주님을 따르는 자기뿐이었지 주님을 따르는 그 외에 또 자기를 생각하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한 방편 외에 자기네들의 다른 방편이 엘리사에게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첫째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주님 생각하는 것 그 외에는 생각이 없는 것, 자기네들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것, 자기가 바라보면서 따르는 주님만 생각했지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없는 것, 주님을 따르는 그 방편뿐이지 다른 방편이 없는 것 요것을 첫째로 주님이 요구하십니다.

주님만 보이고 자기가 보이지 않는 그것이 엘리사였습니다. 자기야 가난하든지 죽든지 어렵든지 천해지든지 어찌됐든지 주님만을 바라봤지 자기를 생각하는 그것이 엘리사에게는 없었습니다. 또 주님을 따르는 것 그 한 방편만 자기에게 있었지 그 외에 다른 방편은 따라가되 ‘이렇게 따르자. 저렇게 따르자.’ 그 조정하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바라보는 주님 바라보는 그 외에 다른 것을 다른 것이 보이지 안했어. 주님을 따르는 그 방편 그 일 외에는 딴 것이 없었어.

이것을 우리에게 첫째로 원하시고, 둘째는 그 두 분이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으로 요단강 물이 마르고 육지같이 되어져서 육지로 두 분이 건너갔다’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이것은 요단강은 죽음이라는 것을 모두 다 상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주님 앞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죽음에 거치지를 않았고 죽음이 없는 그런 생애에서 살았습니다. 죽음을 발 아래 밟고 주님은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없는 신앙으로 주와 동행하는 요것을 둘째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생도들은 다 멀리서 저 살센 요단강을 어떻게 하는가 보자 하고서 구경만 했지 따라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요단강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요단강이 육지 되어서 건너갔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죽음에 가로막혀서 주를 따라가던 이 걸음을 가지 못할 때에, 죽음이 가로막을 때에 이 죽음을 발 아래 밟고 죽음을 꿰뚫는 그 죽음에서 생명을 내어놓고 죽을 각오하고 가는 것도 좋지마는 믿음으로 죽음을 호령치고 죽음을 멸시하고 죽음을 무시하고 죽음이 그 앞에 가로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발아래 밟는 이런 권능의 사람으로 주를 따르는 이것을 둘째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근 칠십 년 우리 나라에 선교한 그 끝에 하나님께서 요단강 같은 이 신사참배의 죽음이라는 그 죽음이 가로막았을 때에 대부분의 신자는 이 요단강 물에 다 막혀서 건너가지를 못하고 다 요단강 이편에서 굴복했습니다. 다 신앙의 정조를 팔고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약간의 신자들은 죽을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그런 성도들도 있었지마는 그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부르면 전 인류가 다 달려들어도 내 생명을 붙들 수 없고 주님이 부르지 않으실 때에 아무도 내 생명을 해할 수가 없다는, 오직 생명에 주님만이 주권하고 계시는 이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비웃고 오히려 웃으면서 이 죽음이라는 이 방어를 가지고 막을 때에 거게 제재를 하나도 받지 안하고 통과했습니다.

그런 신자들이 일본에는 없었습니다. 일본 전 교계에 그때에 이 요단강을 육지로 삼아서 건넌 그런 신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이 엘리사와 같이 이것을 꿰뚫고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결국은 그 세력들까지도 정복하고 승리한 그런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8.15 해방 후에 일본에 있는 그 교세와 한국에 있는 교세는 이는 천지의 차가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복음이 승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그 교세들이 심히 쇠퇴하고 복음 전파가 아 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교회를 찾아볼라 하면 소문을 듣고 역부로 찾아가도 잘 만날 수가 없답니다.

그러나 한국은 즐비한 것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교세가 흥망되는 이것이 언제 뿌리를 박아 그리 됐느냐? 왜정 말년에 거기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던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둘째는 죽음에 막히지 않는 신자가, 죽음에게 막혀지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지기를 둘째로 여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일반적인 선지 생도의 대우로 일반적인 교훈을 했지 그이에게 진정한 일반을 탁월한 그런 교훈을 하지 않했습니다. 비로소 요단강을 건너고 난 다음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모든 생도들이 다 나를 따라오는 일이 위험하고 나도 네가 나를 따라오는 일이 위험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이렇게 따라왔는데 무엇 때문에 따라왔느냐? 나에게 요구가 뭐이냐? 하나님께서 나를 올리워 가실 터인데 가기 전에 나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면 내가 너에게 그 요구를 이루어 주리라. 내가 이방인의 정권도 내가 정해 줄 수 있고. 이스라엘의 정권도 내가 정해 줄 수 있고, 정통의 유다에 대한 권세도 내가 너희에게 정하여 줄 수 있고. 모든 이적과 기사의 능력도 너에게 줄 수가 있으니 네가 무엇을 요구하겠느냐?’ 할 때에 엘리사는 ‘그런 것이 다 좋지마는 보다 좋은, 당신에게 영감된 그 영감이 나에게 갑절이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갑절을 말한 것은 엘리야보다 배나 영감 받아서 엘리야보다 위에 가는 그런 허영심이나 그런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는 엘리야보다 근본적으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영감이 더 충만치 아니하면 하나님게서 요구하시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갑절이나 달라고 그렇게 구했습니다.

그때에 엘리야는 말하기를 ‘네가 이방 정권을 나에게 달라고 해도 그 어렵지 않고 이스라엘의 유다의 그 모든 권세를 달라고 해도 이적 기사를 행하는 그런 권능을 달라고 해도 그것은 어렵지 않은데 네가 제일 어려운 것을 나한테 구했다. 이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나를 하늘로 올리워 가는 이것을 네가 끝까지 봐야, 바라봐야 이 일이 이루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고서 승천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에 엘리사가 엘리야를 보니 불병거요 마병이었습니다. 그때에 엘리사가 ‘아, 이스라엘을 국방한 분이 이분이시로구나. 이 엘리야 한 분이 이스라엘의 국방을 했었구나.’ 하는 것을 엘라사가 보고, 그 회리바람이 불어서 참 눈을 뜰 수 없는 굉장한 그런 어려운 바람 속에서도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볼 때에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서 땅에 던지는 것을 보고 자기의 주가 떠났기 때문에 거기서 하도 기가 막혀서 옷을 찢고 그 겉옷을 주워 가지고 참 흠신없이 다시 요단강에 와 가지고 군담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병이요 이스라엘의 병거는 하나님께서 데려 가시고 남아 있는 우리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하며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탄식을 하면서 허퍼서 요단강 물을 이 두루마기로 이래 가로치니까 요단강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엘리사는 이 증거를 가지고 다시 건너갔던 요단강을 건너와 가지고 엘리야가 하지 못한 그 일을 엘리사가 완전히 끝을 마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계시를 주시는 것은 첫째는 동역자의 모든 유혹을 네가 배격하는, 주님만 보이고 주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 지식 하나만 있지 다른 지식은 하나도 없고 주님 바라보는 요거 하나, 주님 따르는 요 지식 하나, 요것 둘만 네가 가진 사람되어 이 외에 수많은 것을 가진 그런 모든 동역자 신앙 동지자를 배격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되어져라 하는 요것을 주님이 첫째로 요구하시고,

모든 신앙의 동지글이 죽음이라는 이 사선의 경계에 다 가로막힐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이 사선을 밟고 육지같이 없는 것 같이, 이 사선이 없는 것 같이 이 죽음이 너희에게는 추호의 자격도 충격도 공포도 염려도 하나도 주지 못하는, 이것이 없는 육지같이 지난 거와 같이 이렇게 죽음에 가로막히지 말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음 없는 이 신앙 걸음을 네가 걸어라. 죽음에게 막히지 않고 주를 따르는 이 걸음을 걸어라 하는 것이 둘째로 주님이 요구하셔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고,

셋째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요구한 이 요구는 오늘 우리가 엘리야로 상징한 주님의 이 영감을 우리가 모든 땅위에 있는 모든 것보다 이 영감 하나를 소원하는 이런 소원의 일꾼이 되어 달라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셋째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감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영감은 간단하게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을 입고 피조물의 형상을 입어 죽기까지 복종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지셨던 영감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의 형편이나 사정이나 주장이나 견해나 계획이나 주님 앞에서 자기의 것 어떤 것이든지 자기에게 대한 해든지 유익이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든지 싫어하는 것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주님 앞에서 자기 것 하나도 없는 자로 주님 앞에 자기 것 하나도 없는 자로 주님에게 복종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로 요 영감을 가지신 것이 주님의 영감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주장이나 사상이나 소원이나 자기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앞에 주님의 것은 하나도 가지지를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의 전부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그것으로만 되어 가지고 있었지 복종하는 거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요것을 가지신 것이 우리에게 엘리야로 보여 주신 이 주님의 가지신 영감입니다.

당신이 말할 때에 이거는 내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이 내 입으로 나왔지 당신의 말은 한 마디도 안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이라 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이 학생들도 셋째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주님 앞에서 죽는 날까지 자기가 없는, 자기를 하나도 내세우지 안하고 다만 자기는 없는, 무한은 아니지마는 자기는 주님 앞에 복종하는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주님에게 복종하는 것, 복종하는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것이 주님이 가지신 영감이십니다.

또 한 영감은 무엇인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자기 요거 뿐이지 딴 것 없는데 아버지의 명령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 있는 것 다 소유와 몸과 생명 하나도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고 솔빡 다 던졌습니다. 다 바쳤습니다. 요것이 주님이 가지신 영감이십니다. 이 주님이 가지신 영감을 온 세상을 취하는 것보다 이 하나를 그런 걸 물리치고 이 하나를 요구하는 이런 양성원 졸업생이 되기를, 또 이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이 셋째로 원하셔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소원을 했지마는 이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주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거기에까지 회리바람 속에서 비로소 이 영감을 꼭같이 받아 가지고 그 후계를 이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 동지 신앙 동역 요 두 가지 외에 있는 모든 동역자를 배격해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 주님을 따르는 것, 주님을 따르는 그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주님을 따르는 지식, 주님을 바라보는 것, 요 두가지만 가진 엘리사는 수많은 성도는 저절로 배격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어떤 각오 어떤 결심 어떤 수양을 가진다 할지라도 요 두 가지 외에 하나든지 둘이든지 가졌으면 그 사람은 요단강을 권능으로 육지로 건너지는 못합니다.

베드로가 배 위에서 물위로 걸어가는 물위로 걸어가는 그 순간 그 때는 요 두 가지만 베드로가 가졌습니다. 베드로는 그때는 요 두 가지만 가졌습니다. 요 두 가지 가졌다가 하나가 더 들어올 때에 물에 빠졌습니다. 엘리사는 요 두 가지만 가졌습니다. 다른 생도들은 요 두 가지 외의 걸 가졌습니다.

그 신앙은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태산을 올라가는 거와 같은 그 순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첫째가 우리의 신앙 동지의 유혹을 벗어나야 됩니다. 신앙 동지의 유혹을 벗어나야 됩니다. ‘목회를 하지마는 너무 그 설교는 극단적이고 그는 너무 초현실적이기 때문에 합당치 않다. 이 설교자가 살을 붙여서 세상 반 천국 반 이렇게 아롱아롱하게, 이렇게 비빔밥을 만들어야 된다. 이래야 목회가 되고 이래야 교인들이 모이고 성공을 한다.’ 해서 지금 우리 진영의 교역자들도 이 비빔밥 목회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 두 가지 외에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요 두 가지 외에 가진 자는 절대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하나도 못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생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주님을 따르는 그 방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라 해도 나는 요것뿐이다. 뭐라 해도 나는 주님을 지금 바라보고 주님 바라보는 것 주님 따라가는 것 요 두 가지 외에는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작년 졸업 때에도 제가 이 말씀을 증거를 했습니다. 증거했으나 너무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이 말씀을 훼딱 뒤비뜨려서 주 파묻어 버려서 뒤에 다시 캐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첫째는 이것입니다. 양성원을 올해 졸업하는 사람이 다섯 사람인데 다섯 사람 너무 많습니다. 일당 천이 아니라 일당 만이요 일당 일억입니다. 한 사람이 세계를 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계를 움직였습니다. 세계를 구출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누가 위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큰 자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의 자손이 하늘의 모래의 수와 하늘의 별의 수와 땅의 바닷가의 모래의 수와 같이 된다고 했지마는 하나의 그것을 예사롭게 보통 쓰는 문자로 알았지 그렇게 심청하지 않았지마는 그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서 역사에 수많은 기독자들이 나올 것을 하나님께서 예약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오늘에 졸업하는 사람이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오늘 이 말씀 주신 여기에서 교훈을 받아 모든 안일주의, 모든 세상주의, 모든 유물주의, 모든 육신주의, 모든 가족주의, 모든 현실주의 이런 모든 유혹들을 다 배격하고 온갖 사상 온갖 주의 온갖 포복 온갖 소욕 다 버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 주님 한 분만 바라보고 시대도 미군도 정권도 인물도 세상에 어떤 것도 다 집어 던지고 주님 한 분만 바라보는,

이분이 창조주요, 이분이 주권자요, 이분이 주재자요, 이분이 홀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구원을 당신이 정하신 분이요, 이 구원 위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이분이 이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모든 것이 섭리해서 개미 한 마리 움직이는 개별 섭리까지도 이를 위해서 움직이는 이분 한 분이면 족하다. 이분 외에 바라볼 것 없다.

이분 바라보고 이분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이분 따라가는 것, 이분을 따르는 것, 이분 따르는 것 외에는 나에게는 사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욕망도 없고 포부도 없고 희망도 없고 소원도 없고 내 전부 이분을 따르는 것, 내가 바라보는 거는 이분만 바라보는 것, 요 두 가지가 정리되어서 수립되고 정돈이 된 사람이면 그는 오늘 이 세계 교계를 살릴 수 있습니다. 능력이 먼데 있지 않습니다. 능력이 취하기 어려운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와 같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세상이 무서워서 이 죽음의 방어선에 다 막혀서 아무리 소원하는 저편이지마는 가지를 못하고 죽음의 방어선에 다 막히고 겁이 나서 다 뒤로 도망 치지마는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행하여 요단강을 말리고 육지로 건너갔다고 말씀하신 대로 천하 인간이 두려워하는 그 죽음을 질근질근 밟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무런 죽음 없이 웃음으로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평안함으로 보는 사람이 위험 천만하지 본인에게는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으로 이렇게 죽음을 밟고 초월하는 이 신앙 걸음을 걷는 그 순서를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 앞에서, 다니엘이 사자굴 앞에서, 사도 바울이 온갖 죽음 앞에서, 모든 사도들이 온갖 죽음 앞에서 손양원 목사님이 죽음이 기쁘고 즐거워서 이렇게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두려워하는 죽음이 그들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평생 소원하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가까이 할 수 있고 만족히 섬길 수 있고 만족히 사랑할 수 있는 귀한 기회로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다 첫째 이 유혹의 동지자 유혹의 신앙 동역자 이것을 배격한 그 순서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야, 너무 그렇게 하면 가정도 돌봐야지 몸도 돌봐야지 이 사회에 모든 사회도 돌봐야지 교인들의 처지도 돌봐야지.’ 이래 가지고 안일주의로 세상주의로 육신주의로 물질주의로 합리주의로 도덕주의로 인화주의로 다 이렇게 썩어지고 마는 이 세대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이 사이비한 썩어가는 이 모든 타락한 이 동역에 붙들리지 말고 이것을 배격하고 뛰어 넘어라 하는 이것을 당신이 원하십니다.

이러고 나면 그 앞에 가로막아 있는 것은 요단강입니다. 엘리사는 건널 힘이 없지마는 엘리야를 따라갔을 때에 엘리야가 두루마기를 똘똘 말아 가지고 이러니까 척 갈라졌습니다. 육지로 건넜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두루마기를 친 게 아니라 일생동안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옷도 그거 두루막도 상징이요. 그를 땅위에서 빛으로 세상 빛으로 살게 한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죽음을 무난히 통과했소.

(나중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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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1/26 01:00 [수정/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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