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사라질 때 친구가 아니게 됩니다

Posted at 2012/06/15 20:23 // in Essay // by Daniel
친구 사이엔 용서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니 용서할 일이 없어야 하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용서할까말까 이유를 묻는다면
아니 묻지않고 끝내버린다면
친구가 아니게 된거지요

친구는
싸웠다고 친구가 아니게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서 사라질 때 친구가 아니게되는 거지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될 때 친구가 아니게 된 겁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연락할 수 없을 때 친구가 아니게 된겁니다
더이상 연락하는게 어려워지면 친구가 아니게 된겁니다

너무...
너무 배려하면 친구가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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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없다는 건

Posted at 2012/06/14 16:07 // in Essay // by Daniel
친구가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입니다.
특히나 좋은 것이 있어도 나누지 못할 때,
그럴 때 더욱 부재를 느끼게 됩니다.

슬플 때에는 정말 깊은 친구가 아니라면 나누기 어렵기도 하고.
또 다른 영역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나누기 쉽기도 합니다. - 상담해줄 사람이라던가

그러나 기쁠 때,
좋은 것이 있어서 알려주고 나눠주고 싶을 때,
축하할 일이 있어서 이야기해주고 함께 기뻐하고 싶을 때,

그럴 때는 친구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친구가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더 외롭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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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Posted at 2012/06/07 14:19 // in Essay/DailyComment // by Daniel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말을 할 수도 없고
답답하고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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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 지킬 수 있는 것만이 자기 것입니다.

Posted at 2012/06/07 02:38 // in Essay // by Daniel

소유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 까지만 자기가 소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게 있나요?

ㅎㅎ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가질 수 있는 겁니다.
가지고 있다는 느낌만 있을 뿐이죠.
사실상 "사유재산" 이란 것은 개념적인 것일 뿐이지요.

실제 내가 돈이 1억이 있다 한들, 사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통장에 찍힌 숫자 뿐입니다.
실제 '지금' 내가 사용할 수(누릴 수) 있는 것은 내 손안에 들고 있는 돈 밖에 없습니다.
( 아니 돈이라는 개념에 의한 약속 밖에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
지금 내가 집이 10채 있다 한들, 사실 나는 한번에 10개의 집에 살 수 없습니다.
한번에 한 집씩. 단지 한 가지씩만 누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조차도 소유했다는 권리 문서만 어딘가 있을 뿐이죠,
정부에서 나몰라라 하면 어떤 힘센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 것으로 하고 살아버리면 눈 뜨고 빼앗겨 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행정 착오, 전산 착오로 기록이 삭제돼 버리면, 이마져도 없어지고 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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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보어 전쟁을 아시나요?
보어전쟁은 보어인들과 전쟁한 전쟁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전쟁입니다.
보어인들은 주로 네덜란드계 사람들로 남아프리카에 오래전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네덜란드가 세계의 무역을 제패하던 시절에 남아프리카에 거점을 잡고 살아왔지요

분명 남아프리카는 이들 보어인들의 "소유"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요

영국이 이 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이 보어인들이 살던 땅에서 금이, 막대한 금이 나왔거든요.
당시 전 세계 생산량의 1/4이나 되는 금이 생산되었습니다.
거기에 다이아몬드도 나왔습니다.

이것이 축복인 줄 알았습니다.
보어인들은 백인-문명인이었고, 백인 문명과 함께 아프리카어도 구사할 줄 알며, 네덜란드를 비롯한 프랑스, 플란더즈 등에서 이주해 온 (영국의 성공회와 비슷한) 개신교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열심히 저항했지만 영국의 총력전 앞에서 굴복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인구 50만에 총 병력 7만인 보어인에 대하여 45만의 군대를 동원하고,
전쟁 막바지에는 그들의 전답을 불사르고 총 21만명을 강제 수용소에 집단 수용합니다. 이곳에서 약 2만명이 사망합니다.
(이것이 이후 2차대전의 유대인 집단 수용소의 모델이 됩니다)
결국에 축복인 줄 알았던, 자기의 "소유"가 된 줄 알았던 남아프리카 땅, 금과 다이아몬드는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킬 수 있을 때까지만 자기 것이었죠.
오히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소유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
나라나 민족이 아닌 사람의 예를 들어볼까요?
너무 예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미모'는 자신의 "소유"일까요?
그리고 축복일까요?

어떤 사람은 그 미모를 통해 많은 것을 얻고 누리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미모 때문에 기구하게, 불행하게 살다 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너무 예쁘다가, 이러면 안되지만 나쁜 사람, 힘센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버리기도 합니다.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강한 사람, 강한 공동체에.

진정 내가 "소유"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개념일까요?
다만 illusion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간에 암묵적으로 맺어진 일종의 '약속' 같은 거지요.
늘 지켜지고 있다고 믿지만 때때로 -- 꽤 자주 깨뜨려지는 약속.

진정 내가 무언가를 누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원한 바람, 맛있는 음식, 예쁜 옷, 자동차, 살 집, 가정부의 서비스..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진정 자기를, 나의 소유를 지켜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욥38)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것이라고 자랑 말고, 당연하다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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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잡아먹지 말자

Posted at 2012/05/16 13:10 // in Essay // by Daniel

옳은 것 보다 예의 바른 것이 더 중요하다. 옳지 않은 건 옳지 않다고 얘기하자. 싸울 때는 싸우자. 그러나 그 사람을 여전히 한 인간으로 존중할 줄 아는 예의는 있어야 한다.

옛날 우스개소리 식인종 씨리즈에서, "식인종 아이가 부모를 잡아먹었다. 그러고 울었다. 나는 고아라고"

심각한 이야기다. 나는 그 이야기가 자꾸 생각난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 잡아먹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 잡아먹고, 옳은 사람은 그른 사람 잡아먹고, 그른 사람은 옳은 사람 잡아먹고,

그래놓고 아무도, 존중할만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친한 사람 아무도 없다. 외로와진다.

젊은이들이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무례하고.. 말 한마디라도 말을 조심하고 예의를 갖추고 그러고 살면 참 좋을텐데.

-김동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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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 수 없는 것을 주고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Posted at 2012/04/13 09:50 // in Essay // by Daniel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 Philip James Elliot, 1927년 10월 8일 ~ 1956년 1월 8일

I tell you, 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for yourselves, so that when it is gone,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dwellings. - Luke 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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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하게 되는 것

Posted at 2012/03/12 07:57 // in Essay // by Daniel
사람을 시험해보게 되는 건..
그리고 계속 실망하게 되는 건 참 슬픈 일이다
그의 초라함이..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님이 드러날 때
실망하며, 나 자신을 한하고 더 좋은 점이 있을 거라 위안하며 다시 살펴보게 된다. 좋은 점을 찾으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점을 찾으려.
그리고 이제는 저번과 달리 두려워하게 된다
어쩌면 지금이 내 잘못으로 인한 징계의 시간인지
아니면 나를 겸손케 하시려 다시 말씀하지 않으시는 지

주님의 침묵.
그건 내게 너무나 큰 두려움이다.
다시 그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고 싶지 않다.
다시 아프고 싶지 않다.

그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러면 내가 비겁해 보이겠지?
그것이 두려워 내가 엎드리고 돌아서면 다른이들에게 비겁해보이겠지?
... 그래도 두려워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것이겠지?
살 수 있는 길이겠지?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남을 두려워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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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친구로 부터 잊혀진다는 것,
아무 것도 아니었던 사람으로 되어진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탓이 되어버리는 것은 더 안타까운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단절의 아픔을 주었는지..
상처를 주었는 지..
역지사지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그게 어쩌면 또다시 "체휼하는" 것이겠지.

다시 또 잃게 된 사람을 겪고,
내게 또한 그랬던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게 되는 거겠지.

그리고 나 자신의 약함을 다시 직시하고,
엎드릴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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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6 젊은이 예배 전종국목사님 마3:1-7 "내 인생에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Posted at 2012/02/29 08:25 // in Essay // by Daniel
2012-02-26 젊은이 예배 전종국목사님 마3:1-7 "내 인생에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설교
마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경쟁과 효율이 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강조되다 보니 관계성보다는 치열한 싸움만 남게 된다. 이기주의 팽배

학교의 선생과 학생의 관계도 단지 지식 전달자일 뿐
학교 급우들도 비교 대상, 경쟁자가 된다

정말 행복할까?

시간이 흐를 수록 삶이 점점 피곤해진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감이 사라진다
제대로 살고 있는 지 회의감마져 든다

결국 경쟁, 효율만 외치다가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된다. 혼자만 남아 성공해봤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경쟁과 효율의 밑바탕에는 결국 나의 욕심이 있다. 그리스도가 아닌 "나" 가 주인 노릇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봐야 한다.

성장과 성공이라는 잠시 잠깐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원치 않는 깨어짐의 아픔을 겪게 된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다.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우리의 관계가 사랑을 전제로 하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과정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하나님을 높이고 주변의 관계가 따듯해질 것이다
서로를 긍휼히 여겨줄 것이다
그럴 때 동역의 의미가 살아나고 서로를 소중히 여겨주게 된다
본질적인 삶의 질문과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가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요햔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가실 길을 닦은 마지막 선지자
이사야에 나온 예수님 이전에 광야에 외치는 소리

요한은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제사장 아버지와 아론의 직계 어머니
출생 사건도 특이하다
이 스토리를 들었던 사람들은 기대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닐까
이른바 엄친아였다.

충분히 정계진출하여, 제사장 계에 진출하여 떵떵 거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택한 곳은 그런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고 인도함을 받았던 광야였다
광야는 음성을 듣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명을 찾는 장소이다.
물론 위험하다. 곳곳에 위험한 동물과 곤충이 있었다.
살아갈 수 있을 지 없을 지 투쟁하는 장소. 치열한, 각박한 곳
우리의 인생 삶의 자리. 광야.
왜 광야의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실까. 하나님 앞에 다시금 중심을 잡으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붙드는 생명된 삶을 살라. 인생에 예수님을 붙들라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를 내 인생에 주시는 것이다

내안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는 곳.
내 욕망, 허영심, 자랑, 나의 우상과 왕들이 광야란 거친 땅을 거치면서 드러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오면서 기고만장 했다.
그러나 거친 광야를 들어가자마자 형편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 -불평과 불만, 원망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광야를 피하지 말자.
내 삶의 광야를 기뻐하면서, 필요하다면 요한처럼 광야의 삶을 택하라
광야의 삶에 들어온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는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광야를, 교회와 사람이 그런 시간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세례요한을 사용하신 이유는 광야를 통해서 겸손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인지, 종인지 알게 된다
내가 주인공인지 조연인지 알게 된다.
그는 조연이 되는 것을 기뻐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 이후에 어떠한 삶을 선택하는가
예수님을 위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은 자기가 광야의 외치는 소리임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메시지만 외치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소리다
전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메시지만 남고 나는 사라지는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다
주인공을 위한 조연이 삶

우리는 철저히 조연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 중요하지만 우리 인생가운데 우리 주님이,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단 사실을 잊지 말자

그의 탁월함은 무엇인가
분수를 알았다.
주인공이 오셨을 때 영광을 돌렸다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조연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자신의 면류관을 던지면서 나의 주인되시고 왕되신 주님을 고백했다

나약해 보였을 지도모르는, 한참 모자란, 경쟁에 지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 삼으셨다
약한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시는 것

반면에 경쟁과 효율에서 승리한 자, 세계 흐름을 알고 성공한 자들에겐 하나님은 아무 상관 없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되심을 고백하며 철저히 조연을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다. 당회가, 목사가 아니다.
우리 그런 인생 살자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광야로 운집했다.
예수님 사역 때에 일어났던 일과 같은 사건이었다.

왜 왔을까
주차할 편한 공간도 없고 불편한 자린데 왜?
듣기 위해서다
과연 세례 요한의 뛰어난 설교 때문일까
그가 전대미문의 부흥사였기 때문일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설교 찾아 옮긴다.

그의 언변은 매우 거칠었다.
교육 많이 받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비교할 때 보잘것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한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변화됐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 영적인 큰 파장을 주었다.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은 사람들의 귀에 맞게 말씀을 가공했다.
그러나 요한은 달랐다. 그대로 전하니까, 그대로 사니까 그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들은 거칠고 빡빡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자.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자체를 먹자.
거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다.
내 입맛에 맞게 가공된 설교 백번 들어봐야 변화 없다. 유명한 목사 설교 찾아 들어봐야, 소용 없다.
듣는 귀만 넓어져서 교만해질 따름이다.
교회에 앉아서 평가한다. 이래서 문제 저래서 문제...
교회 규모, 겉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
그러면 2000년 전 그 때 그 당시의 부흥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말씀이 우리 삶의 변화의 원천이 된다.

듣기 좋은 설교, 유명한 설교에 끌리는가
어쩌면 그것은 내 맘에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입맛에 따라 내가 주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왕이 되게 하라
거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순종할 때 변화된다
내 삶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회복되고
내 삶에, 내 팀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온전한 통치가 회복될 것이다.

나는 없어지고 그분만 남으면 된다
예수님만이 주인되시고 주인공이시다.
수많은 큰 교회와 사람들이 사라졌다.
예수님 앞에선 무엇이 중요한가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됨이 중요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기억하시는 성도가 되자. 그러면 된다

주인공 되신 예수님을 빛내는 조연 인생 되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삶으로 살자.
그래서 하나님께 기억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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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 말씀

Posted at 2012/02/27 09:28 // in Essay/DailyComment // by Daniel
살전5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The one who calls you is faithful and he will do it.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자.
중보하자
말씀대로 이루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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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 렘29:11~ 부르짖으면 들어주시고 회복시켜주신다

Posted at 2012/02/27 08:51 // in Essay // by Daniel
예레미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고
온 마음으로 주님을 구하면,
찾을 것이고 만날 것이다.

다시 돌아오게, 다시 회복되게 하시리라.

이 말씀 붙들고 기도하자
중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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